<전자정보통신 연구계를 움직이는 사람들>(7)국산 패키지 소프트웨어

우리나라처럼 토종 소프트웨어가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도나 이스라엘이 소프트웨어 강국이라 평가받지만 이는 대부분 선진국의 용역을 받아 개발하는 주문형 소프트웨어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저스트시스템을 비롯한 토종 소프트웨어 업체가 한때 분투했지만 외국 소프트웨어 업체에 시장을 점령당해 이제는 겨우 명맥만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위시한 소프트웨어 거대 기업이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최소한 패키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선전을 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워드프로세서나 홈페이지 제작 소프트웨어·백신·리눅스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경쟁력과 시장 점유율을 고루 갖춘 곳은 찾기 힘들다.

 특히 최근에는 토종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올해는 최초로 100억원 이상의 소프트웨어 수출 기업이 나올 전망이다.

 이처럼 토종 소프트웨어 업체가 탄탄한 입지를 다진 이면에는 많은 개발자의 노력이 숨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핵심 개발자의 공로는 매우 크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미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은 외국 제품 일색이 됐을지도 모른다.

 토종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유명한 인물들이 현재 대부분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자의 위치에 서 있다. 아래아한글을 만든 드림위즈 이찬진 사장이나 V3를 개발한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 나모웹에디터 개발 주역인 나모인터랙티브 박흥호 사장, 바이로봇으로 유명한 하우리 권석철 사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제는 그 자리를 2세대 개발자들이 채우고 있다. 그 중에는 제품이 탄생하던 초기부터 관여한 사람도 있고 다른 제품을 개발하다가 나중에 합류한 경우도 있다. 시기야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토종 유명 소프트웨어의 저력은 현재의 개발자들이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종 소프트웨어의 자존심으로 평가받는 한글과컴퓨터의 아래아한글은 최승돈 전무와 양왕성 이사의 투톱이 만들고 있다. 최승돈 전무는 2000년 11월 한글과컴퓨터에 영입됐으며 양왕성 이사는 한글과컴퓨터에 12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른바 신구 개발 주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1960년생으로 8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최승돈 전무는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계속해온 해외파다. IBM을 비롯해 미국 굴지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거쳤다. 한글과컴퓨터 입사 후 아래아한글 워디안과 아래아한글 2002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최승돈 전무의 업적은 아래아한글을 모듈화한 것으로, 향후 제품 개발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아래아한글은 도스 기반에서 윈도 기반으로 넘어가면서 제품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복잡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최승돈 전무는 이를 개선한 것이다.

 소프트웨어개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양왕성 이사는 아래아한글의 산증인이다. 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졸업과 동시에 한글과컴퓨터에 입사해 지금까지 아래아한글 개발에만 주력했다. 아래아한글 1.52에서 아래아한글 2002까지 모든 아래아한글 제품의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94년 팀장으로 제품 개발을 관장했던 아래아한글 2.5는 서울정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95년에는 최초의 윈도용 아래아한글인 아래아한글 3.0b를 개발해 정보통신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국내 홈페이지 제작 소프트웨어 시장을 선도하는 나모인터랙티브의 나모웹에디터도 아래아한글과 마찬가지로 쌍두마차 형식의 개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김형집 이사와 우원식 팀장이 팀워크를 이뤄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김형집 이사는 미국에서 나모웹에디터 6을 개발하고 있고 우원식 팀장은 나모웹에디터 5 업그레이드 버전의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를 졸업했고 한글과컴퓨터 개발 팀장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형집 이사는 까다롭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자신이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일을 하지 않는다. 반면 일단 개발에 착수하면 항상 뛰어난 제품을 내놓는다. 대학 시절 활동한 서울대컴퓨터연구회에서 개발에 관해 논쟁이 붙었을 때 ‘김형집에게 물어보자’가 정답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대학가에 김형집 추종세력(?)이 남아있을 정도다.



 우원식 팀장은 나모웹에디터의 개발 실무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밤에 작업하는 올빼미 스타일인데 비해 우원식 팀장은 보통 직원처럼 오전 일찍 출근한다. 나모웹에디터 5의 사내 베타 테스트 당시 사내 버그 리포트를 받는 대로 곧바로 프로그램을 수정해 수정 답장을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토종 소프트웨어 가운데 외국 제품에 비해 가장 우위를 보이는 것은 백신이다. 안철수연구소와 하우리에 이어 에브리존이 가세해 토종 백신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만들고 있다.

 국내 1위에서 해외 진출까지 성공하고 있는 안철수연구소는 3명의 핵심 개발자가 있다. 백신을 개발하는 앤티바이러스연구실의 조시행 이사, 네트워크 보안 기술을 개발하는 보안연구1실의 이희조 실장, 무선인터넷 보안을 담당하는 보안연구2실의 원유재 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가운데 V3는 조시행 이사가 지휘하는 앤티바이러스연구실 소관이다. 조시행 이사는 84년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아건설과 쌍용정보통신, 한글과컴퓨터를 다녔다. 96년 1월 안철수연구소 입사 후 백신 개발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희조 실장은 포항공대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퍼듀대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안철수 사장의 삼고초려로 안철수연구소에 합류했다.

 원유재 이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14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무선인터넷과 홈네트워킹 분야의 보안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데이터 보호 솔루션인 앤디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하우리의 백신인 바이로봇은 백동현 기술연구소 소장이 이끌어나간다. 전체 직원 80명 가운데 60%가 넘는 50명의 개발 인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96년 숭실대 인공지능학과를 졸업하고 LGEDS(현 LGCNS)에 근무하다가 권석철 사장과 함께 하우리를 공동 창업했다.

 하우리 창업 후 백신의 핵심인 엔진을 직접 개발했다. 또 현재의 하우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인 CIH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퇴치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바 있다.



 제3의 토종 백신 업체로 주목을 받고 있는 에브리존에는 과거 PC통신 시절 터보백신을 개발했던 임형택 기술개발연구소장이 있다. 임형택 소장은 가톨릭대 학생이던 94년 4월 터보백신을 처음 개발한데 이어 같은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윈도용 백신을 개발한 바 있다.

 군 복무 때문에 개발 현장에서 잠시 떠나 있었지만 2000년 7월 다시 에스앤에스라는 백신 개발 업체를 만들고 에브리존과 합병을 거쳐 현 위치에 있다. 현재 온라인 백신인 터보A.I의 개발을 끝낸 상태다.

 리눅스 분야도 토종 업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레드햇, 칼데라, 터보, 수세 등 유수의 외국 리눅스 업체들이 국내에 진출해 있지만 토종 업체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리눅스코리아의 이만용 이사는 국내 리눅스 개발자 사이에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서울대 지질학과를 6년이나 다녔지만 컴퓨터라는 외도(?) 때문에 아직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이만용 이사는 리눅스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96년 9월 알짜 리눅스라는 국내 최초의 리눅스 운용체계를 만들었다. 소프트웨어 개발뿐 아니라 98년 10월 한국리눅스비즈니스라는 회사를 몇몇 사람들과 창업하기도 했다. 그 후 리눅스원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쳐 지금은 리눅스코리아 CTO로 재직 중이다. 지난해 만든 리눅스 기반의 대규모 인증 시스템이 두루넷에 공급되는 등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다.

 데스크톱 리눅스에서는 한컴리눅스의 행보가 빠르다. 한컴리눅스는 리눅스 운용체계와 함께 리눅스 기반의 오피스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했다. 그 주역은 이건용 소장이다. 이건용 소장은 건국대 전자공학과 석사 출신으로 한메소프트의 공동 창업자다.

 한메소프트 퇴사 후 토종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사관학교격인 한글과컴퓨터에서 일했다. 다시 99년 7월 비앤디소프트를 창업해 그래픽소프트웨어인 브라이트를 만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파워포인트에 해당하는 한컴프리젠터와 어도비 포토샵과 같은 역할인 한컴페인터를 직접 개발했다.

 임베디드 리눅스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미지리서치는 황치덕 소장이 개발을 이끈다. 서울대 물리학과 입학 후 박사 과정까지 수료한 황치덕 소장은 현대전자를 거쳐 2000년에 미지리서치에 입사했다.

 93년부터 개인적으로 유닉스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왔으며 미지리서치에 온 후로는 리눅스에 사용되는 그래픽사용자인터페이스인 KDE 2.0의 한글화 작업을 했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유사한 스타오피스 한글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Posted by 창신다이
블로그 > 多勿's Blog Ver 2.64

한글과 컴퓨터에서 한컴오피스 2004를 출시한다. 아직 아래아한글2004(이하 한글)는 나왔지만 오피스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번달안에 출시를 한다고 한다. 문득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여러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과연 광고하는데로 한컴은 MS에게서 조금이라도 시장을 가져올 수 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이다. 왜 희망이 안보이는 걸까? 아직 MS와 대적할 정도로 프로그램에 완성도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워드프로세서로만 따지면 오히려 한글이 워드를 압도한다. 비록 소스를 팔아버려서 성능이나 기능상 워드2000에게 따라 잡히다 못해 추월당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익숙해져버린 한글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 워디안을 내놓으면서 워드프로세서 자체로는 전혀 꿀릴점이 없다. 문제는 오피스. 그래 엑셀과 파워포인트이다. 기왕에 저 2프로그램을 쓰는데 한글을 쓰는 것 보다는 워드를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따로 구입할 필요 없이 같이 묶어서 싸게 사면 되니까... 또 호환성도 좋으니 기업입장 아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한글이 선전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비록 워드프로세서만 단독으로 쓰는 층이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한컴은 넥셀과 한컴프리젠터를 파트너로 맞이했다. 늦기는 했지만 한컴도 오피스에 구색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넥셀은 종전에 로터스 1-2-3처럼 잠시 빌려다가 쓴 용병에 불과하다. 단지 조금더 잘 훈련된 용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같은 오피스 프로그램끼리도 제대로 호환이 안되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리눅스용은 자체 스프레드시트가 있는데 왜 그것은 컨버전을 안할까?라고 생각한다. 너무 기본적인 것만 지원해서 그럴까? 지금 3.0 베타테스트까지 하는 것으로 봐서는 넥셀정도는 충분히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용병을 포기하고 자체적으로 제작을 한 프로그램을 내놓아야한다. 그래야 호환성이라는 중요한 적을 제거할 수 있다.

차라리 그점은 훈민정음 오피스가 한수위다. 워드, 쉘, 프리젠터(멋대로 간단하게 줄여 버렸다.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믿는다. ^_^;)외에도 스케줄관리 프로그램도 자체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오피스 자체적으로는 오히려 훈민정음이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다. 단지 한글에 위력에 밀려서 그렇지...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가격이다. MS오피스가 비싸다며 자기들은 그에 몇분에 1밖에 안된다고 광고를 하지만 오피스 가격과 한글 가격에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다. 한글2002 사용자가 업그레이드를 하는데도 무려 1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간다. 이것은 기존 사용자를 무시하는 처사다. 기존 사용자들을 오피스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오피스와 가격차가 적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글 가격에 상승보다는 오피스 가격에 하락으로 끌어들였어야 할 것이다. 한글815에 성공은 애국심도 있었지만 70만장이라는 기록은 1만원이라는 가격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고가 정책은 한글97 이후 업그레이드에 필요성을 못느끼는 상당수(한글 사용자중 97이전 사용자가 가장 많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한다.)에 사람들에게 더욱더 업그레이드 욕구를 없에는 원인이 된 것이다.

한컴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맞게 대응을 해야한다. 단지 구색만 맞추고 애국심에 호소하기 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천천히 시장을 잠식해 가야한다. 급히 먹은 빵은 채할 수 있으니까...
Posted by 창신다이
한글과컴퓨터(이하 한컴) 사태라고 불릴만한 사건은 지금까지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1. 1998년 MS의 2천만달러 투자 및 한/글 포기 제의

1998년 한참 IMF가 진행될 무렵, 빠르게 Windows용 워드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한컴에게 자금 압박 등의 유동성 위기가 닥쳤습니다. DOS용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90%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며 나태해졌고, 현 드림위즈 사장인 이찬진씨의 인터넷 시장에 대한 이것저것 묻지마 투자때문에 자금 사정이 좋지 않던 던 한컴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악재였고,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습니다.

이때 여전히 DOS용 한/글의 명성때문에, 여전히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30% 미만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던 MS가 한컴에 2천만달러의 투자제의를 합니다. 경영권 요구 등 다른 조건은 없고, 오직 한/글만 포기하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찬진씨는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계약까지 하게 됩니다. MS로써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시잠점유율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한국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면 2천만달러는 오히려 적은 금액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경영권 요구를 뺀 투자 제의를 했던 것이고, 이찬진 사장은 한/글만 포기하면 한컴의 경영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양쪽의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한글 사랑회 등 각종 한/글 사용자모임과 한글학회 등 각종 단체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국민주 운동 등 공개적으로 인수제의를 합니다. 결국 미래에셋을 주축으로 한 투자자들이 주식인수를 하고, 투자를 하게 되었고, 그 유명한 1만원짜리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97 815특별판을 출시해 100만 카피 가까이 판매하면서 한컴은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MS의 2천만달러 투자 제의는 없던 일이 됐습니다. 당시 MS는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미래에셋등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려던 중에 여론이 악화되자 제소를 포기합니다.

이후 한컴은 인터넷 마케팅 전도사로 불리던 전하진씨를 영입하게 되고, 이찬진씨는 한컴 사장에서 물러나 드림위즈를 설립하며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2. 2003년 경영권 분쟁

2002년 한컴은 실적부진으로 인해 자회사인 네띠앙 사장으로 물러난 전하진씨 후임으로 MS 아시아/태평양 마케팅을 담당했던 김근씨를 사장으로 영입합니다. 워디안등으로 주춤했던 한컴을 추스리고 다시 MS와 사무용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유효경쟁을 해보겠다는 의사표시였고, 김근 사장은 이에 부응하듯이 한/글 2002, 넷한글등을 출시하며 본격적으로 MS에 대응할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최승돈 이사등 기존 이사진들이 제대로 성립되지도 않은 이사회에서 기습적으로 김근사장을 해임하고 미국 시민권자인 폴 류(류한웅)씨를 사장으로 선임합니다. 당연히 뒷통수 맞은 격인 김근 사장은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이에 신임 경영진은 다시 김근 사장을 업무방해등으로 제소하면서 한컴 역사상 가장 추악스러웠던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 당시 폴류 사장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로 한글로 의사소통을 하는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한컴에 대주주가 없다는 데서 발생한 문제로, 당시 최대주주라고는 불과 몇퍼센트만을 가진 기관투자자였고, 경영권을 행사하기에는 소유주식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경영권 분쟁의 와중에서 한/글 2002의 XML 기반 차기 제품은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고, 개발진들이 회사를 떠나는 등의 내홍, 서울시스템과 현 대주주인 프라임산업개발의 주식 매집 등 회사가 반쪽 나는게 아닌가 하는 와중에서, 결국 폴류 사장이 경영권 안정 후 스스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프라임 산업개발이 주식을 매집해 대주주로 등극했고, 현 백종진 사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일단락됩니다.

이후 한컴은 본사를 프라임 산업개발의 빌딩인 테크노마트로 이전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9일에 한/글 2004 및 한컴 오피스 2004를 출시할 예정으로, 각종 제품군을 넓혀가면서 다시 유효경쟁 체제를 만들기 위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

출처: 네이버지식인

Posted by 창신다이

경영권 분쟁 '혼돈'걷고 책임경영 시동

<下>주인없는집 '문패' 싸움

2003년 2월 7일. 논현동 한글과컴퓨터 대회의실 분위기가 심상찮다.
오전부터 조용하게 진행되던 이사회가 오후 들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회의는 영어로 진행됐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폴류(류한웅) 사외이사가 먼저 장내 정리라도 하듯경직된 목소리로 안건을 내놓았다.
“이사회에서는 김근 대표이사가 사임하기를 요구합니다.”
물론 예고없었던 안건이 던져진 것.

순간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의 김 사장이 폴류 이사에게 뭔가 어필하려 했고 그와 동시에 일사천리로 표결이 이어졌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짠 듯 김진 재무담당 전무와 최승돈 최고기술담당자(CTO)는 찬성표를 던졌다.
이어 폴류 사외이사를 새로운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안건도 통과시켰다. 이렇게 최고경영자 교체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김 사장으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거지요.
갑자기 대표이사 사임건을 회의 안건으로 올리더니 회사를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앞이 캄캄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어던 것도 아닙니다.
회사 경비를 많이 썼다는 둥, 영업실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둥 그런 것들이 이유라더군요.”

그날 저녁 김 사장은 대표이사 사임 소식을 접한 10여명의 팀장급 직원들과 인근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술잔이 몇 순배 돌 때쯤 김 사장이 사임하면 폴류 이사와 김 전무가 회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사임해서는안 되며, 김 사장이 버티며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 주면 노조를 중심으로이사회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는 요지의 얘기가 오갔다.
이사회를 마칠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던 김 사장은 측근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이사회 결정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2기 한컴의 인터넷 사업 실패에 대한 후유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며 3기 한컴이 시계제로의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이사회 멤버의 전언.
평소 김 사장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스타일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문제로 사임한다는 것과 경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시킨다는 두 가지 내용의 보도자료를 만들어 놓고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수긍하지 않더군요.

결국 김 사장이 퇴임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명확히 전달함에 따라, 김 전무를 비롯해 이사회 멤버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영 수행능력 및 리더십 부재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근 사장을 해임한다’는 보도자료를배포한다.

김 사장으로선 한컴 취임 1주년의 기쁨도 잠시, 회사에서 쫓겨나는 치명타를 입게 된 셈이다.

양측의 엇갈린 이해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채 주말이 지나갔다.
쫓겨나다시피 사장실을 내주고 마케팅 이사실로 출근하기 시작한 김 사장은10일 오전부터 직원들과 모임을 갖고 7일 이사회에서 일어난 대표이사 사임 결정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설명했다.
또 이사회 결정이 합법적으로결정되고 종결되었는지 여부를 법에 의해 판단될 때까지 대표이사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돌렸다.
한컴 노조도 일단은 김 사장에게 힘을 실어 줬다.
이날 노조는 오후 2시 “적법성이 명쾌하게 입증될 때까지 김근 대표를 한컴의 대표로 인정한다”는 성명서를발표했다.

이에 맞서 신임 사장으로 선임된 폴류 사장과 김 전무는 “한컴과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입장을 언론에 알리는 동시에 2002년 매출액이 전년에 비해 31.6%나 감소했다는 공시를 통해 김 사장의 경영 성과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부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3기 한컴은 출범 1년 만에 ‘한 지붕 두 집 살림’이라는웃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한컴이 최대주주가 없는 ‘주인 없는 회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한컴은 1% 이상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사진들이 난리쳐도 누구하나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온갖 풍문이 난무하며 지리한 공방이 이어진다.
김 사장이 허구한날 친구들과 골프치러 다녔다느니, 월드컵 때에는 업무를 뒤로한 채 축구장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느니 갖은 얘기들이 나돌아 다녔다.
뿐만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인 김 전무가 사장이 되기 위해 폴류 이사를 앞세워 김 사장을 내쫓았으며 한컴에서 받는 높은 임금을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받기 위해 김 사장을 해고했다는 등의 소문도 퍼져나갔다.

경영권 분쟁이 법적 분쟁으로 번져 나갈 즈음인 2월 18일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다.
서울시스템이 한컴 지분 3%를 확보해 한컴의 최대주주가 된 것.
김 전무 측의 우호세력으로 알려진 서울시스템(대표 최종표)이 최대주주로 부상함에 따라 경영권 분쟁은 일단 김 전무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울시스템이 한컴 지분을매입한 후 20일 김 사장이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 등에 관한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것.
만약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 노조를 등에 업은 김 사장으로선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는 셈이다.

법원은 1, 2차 심리를 거쳐 3월 19일 최종 판결을 내렸다.
결론은 김 사장의 기대와 달리 ‘기각’이었다. 대표이사 경질에 대한 내용을 김 사장에게 통고하지 않았으나 이사회 결의를 무효화할 만큼 문제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었다.
김 사장으로서는 한숨만 나왔다.
며칠 후에 열린 주주총회에서마저 김 사장이 추천한 사외이사가 선임되지 못하자 상황을 역전시킬 희망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이때부터 김 사장은 한 달 넘게 지속해 온 출근 투쟁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그것도 잠시. 같은 날 김 사장의 고등학교 친구인 백종진 프라임벤처캐피털 사장의 형인 백종헌 프라임산업 회장이 한컴 주식 7.31%를 획득하며 기존 서울시스템을 제치고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김 사장은 2월 경영권 분쟁이 터진 후 동창 모임에서 백 사장에게 한컴 상황을 설명했던 터였다.
순간 상황이 역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날 프라임 측은 경영권분쟁에 대해 중립이라는 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셈이다.

김 전무 측은 최대주주로 부상한 프라임과 상관없이 서울시스템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이사회 결정을 기정 사실화시켜 나갔다.
김 사장 측근으로 알려진 프라임을 통해선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호 경영권 안정을 위한 지분을 교환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맺었으며 당초 계획대로 업무 협력을 위한 테스크포스까지 구성했다.

순탄하게 진행되던 이들의 협력은 4월 들어 삐걱대기 시작한다.
먼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서울시스템의 최 사장. 그는 한컴의 지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한컴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려 했다.
폴류 사장이 물러나야 한컴 지분 확보에 참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최 사장의 회고. “폴류사장을 몇 차례 만나봤지만, 사장감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에만 밝은 전형적인 컨설턴트였죠.
그래서 폴류 사장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3개월 내에 사장직을 사임하는 계약을 맺고 한컴의 해외 전환사채(CB)를 매입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이 화근이었다.
류 사장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다.
류사장을 비롯해 김 전무로 하여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 4월 중순부터 김 전무를 중심으로 한 한컴 이사진과 프라임산업의 접촉이 시작됐다.

급기야 4월 18일 역삼동 라마다르네상스 호텔 뒷편에 위치한 일식집에선 김 전무와 함께 백종진 사장, 박상현 한컴리눅스 사장이 첫 모임을 갖게 된다.
특히 김 전무의 부친과 백 회장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어서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날 모임을 계기로 백 사장과 김 전무의 교감이두터워졌다.
이후 김 전무와 백 사장은 백 회장과 함께 골프를 치며 한컴의 1대주주로 프라임이 들어오는 데 서로 협조하자며 의기투합한다.

이렇게 해서 두 달 동안 지속된 김근 사장과 폴류 이사를 앞세운 김진 전무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4월 25일 프라임벤처캐피털의 백 사장은 3자배정 유상증자(59억원1000만원)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한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아래아한글이라는 키워드로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더니 인터넷주 버블 붕괴와 경영권 분쟁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한컴. 갈등은 더 이상 없을지, 안정성장을 구가할지 새 주인 프라임산업의 경영전반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Posted by 창신다이

인터넷 주가 붕괴…구원등판 끝내 무위로

<中>2기 한컴 전하진의 희비

돌릴 겨를도 없이 일은 진행됐다.
지난 1998년 7월 20일 토종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한글’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 한글지키기국민운동본부는 새로운 한글과컴퓨터(한컴) 경영진 구성에 나선다.

아래아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 정서가 뜨거웠던 만큼 발빠른 한컴 정상화작업이 필요했던 것.
운동본부는 한컴 신임 사장을 공개 모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7월 26일 역삼동 르네상스호텔 맞은편 무한기술투자 사무실.
일요일 오후시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토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한글과컴퓨터를 살리기 위한 사장 후보자들의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진 것이다.

“한글지키기운동본부의 이민화 본부장, 조현종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이찬진 한컴 사장 등 6명의 면접관 앞에서 최종 후보자들이 토론을 벌였습니다. 한컴을 살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것이었지요.
3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은 토론 도중에 포기할 정도로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2명이 막판까지 다퉜습니다.

‘세계화만이 아래아한글을 살릴 수 있다’는 저의 생각이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현재네띠앙을 이끌고 있는 전하진 사장의 회고다.

11시까지 이어진 면접에서 결국 운동본부는 전하진 사장을 한컴 사장으로 최종 선택한다.
이찬진 ‘1기 한컴’ 사장에 이어 ‘2기 한컴’의 주인공으로 전 사장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한 달 뒤 전 사장은 임시주주총회에서 정식 신임 사장으로 추인돼 본격적인 한컴 살리기에 나선다.
한컴 창립 8주년이 되는 98년 10월 9일 ‘아래아한글에서 인터넷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한컴 미래경영 비전을 발표한다.
이와 함께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00만주(100억원) 증자도 공모한다.

하지만 증자가 마음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이틀 동안 진행된 공모에서 청약받은 주식이 130만주에 그친 것. 당시 한컴 주식 시가가 3000원 선이었는데, 5000원으로 공모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런 이유로 99년 초반까지도 한컴의 자금 사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운동본부의 자금 지원이 당초 계획만큼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자금난을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전 사장은 외자 유치를 통해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전 사장은 우선 과거 지오월드를 이끌 때부터 알고 지내 온 투자유치회사 NHS의 한동훈 사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골드만삭스 ING베어링 홍콩상하이뱅크 등 각종 투자은행을 찾아다니며 한컴의 투자가치를 알리는 데  발품을 팔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99년 3월 25일 몇 개월간 지속된 노력으로한컴은 외자 유치에 성공한다.

전 사장의 말이다.
“사실 한동훈 사장이일을 성사시킬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부탁했으니깐요.
그런데 그가 일을 냈습니다. 700만달러 사모 CB 발행에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벤처기업으로서 외자 유치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7000만달러가 넘는 외자를 끌어들이는 초석이 됐지요.”

일단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한 전 사장은 아래아한글과 한컴의 구체적인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우선 아래아한글을 웹환경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넷피스’를 6월 초에 선보였다.
같은 달 국내 최초의 인터넷 채팅 사이트인 하늘사랑(www.skylove.co.kr)을 인수, 인터넷 이용자 기반도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 사장은 2기 한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예카 프로젝트’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카(Your ECommerCe Alliance)프로젝트란, 다양한 인터넷 사이트가 생활하는 허브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계획. 한컴의 가족사인 네띠앙과 하늘사랑을 바탕으로 다양한 중소 인터넷 사이트들이 입점해 공생하는 사이버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때맞춰 인터넷기업 주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새롬 , 다음과 함께 인터넷 3인방으로 꼽힌 한컴의 주가도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
11월에는 홍콩 통신 전문 투자기관인 TVG(텔레컴 벤처그룹)로부터 2200만달러(약 260억원)를 출자받기도 했다.
예카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총알도 마련된 셈이다.

그야말로 핑크빛이었다.
화려한 비전과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 거기에다 외자 유치까지. 막힘없이 예카 프로젝트는 착착 준비됐다.
전 사장과 뜻을 같이한 인터넷기업들도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제휴를 검토해야 했다.
전 사장은 예카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명의 해외 고급 인력을 데려오기도 했다.전 사장은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됨에 따라 당장에라도 예카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카의 주요 멤버였던 나종민 하늘사랑 사장의 회고.
“99년 말 예카 프로젝트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순간, 비용은 많은 들겠지만 성공하면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대형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컴이국내 대표 인터넷기업으로 부상하는 건 시간 문제로 느껴졌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었다는 설명이다.
순식간에 117개의 참여업체를 모은 예카 프로젝트는 2000년 3월 15일 정식 출범하게 된다.
예카 프로젝트와 관련해 한컴이 출자한 인터넷기업만 40개를 넘어섰다. 이때 전 사장도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9회말 구원투수로 나와 한컴을 멋지게 살린 것.
98년 6월 자본금 42억원, 시장가치가 40억원에 불과하던 한컴을 2년도 지나지 않아 자본금 243억원, 시장가치가 2조원에 이르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당시 전 사장의 경영 성과는 1980년대 경영 부실로 주저앉은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를 살린 리 아이어코카 회장에 비유되며 ‘한국판 아이어코카’로 불리기도 했다.

너무 성급한 비유였을까.
예카 출범 한 달 후인 2000년 4월 17일 블랙먼데이로 시작된 인터넷기업의 몰락과 함께 한컴도 빠른 속도로 쇠락하고 있었다.
예카 프로젝트마저 ‘회원의 동의 없이 수집된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발목이 잡혀 실현불가능한 모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게 네띠앙과 하늘사랑의 합병이었다.
이 방법 외에는 인터넷 허브 사이트를 만드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침울한분위기를 반영한 듯 합병도 여의치 않았다.
네띠앙은 2대주주인 무한기술투자의 반대로 합병을 하지 못했다.
하늘사랑은 1000억원대의 주식매입청구권이 몰려 합병이 불가능했다. 결국 전 사장은 2000년 11월 예카프로젝트 포기를 선언한다.

전 사장의 회고. “무척이나 우울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지요. 너무 사업을 서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카의 운명과 궤를 같이해 전 사장의 주가도 하향곡선을 그려야 했다.

5000만달러에 이르는 해외 전환사채 만기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또 기업 주가 하락과 400억원에 달하는 인터넷기업 투자에 대해 대주주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특히 TVG의 경우 인터넷 투자를 부추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주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 사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2001년 8월 전 사장은 더 이상 회사에 몸담을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된다.
당시 한컴 이사회에서도 인터넷사업 실패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다.
전 사장도 할 말이 없었다.

한컴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컸기 때문이다.
그는 곧 한컴이 대주주로 있는 네띠앙을 잘 키우면 한컴과 네띠앙 모두 도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네띠앙으로 옮기기로 마음먹게 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컴을 떠난 셈이다.

결국 한 달 후인 9월 26일 전 사장은 사장직을 사임하며 2기 한컴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Posted by 창신다이

‘한국의 빌게이츠’부도 몰리자 MS에 투항

한글과컴퓨터’는 우리나라 벤처기업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난 90년 ‘아래아한글’을 기반으로 설립돼 1세대 벤처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지옥을 맛봤고, 2000년 벤처 열풍에 동반해 달콤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잠깐, 한컴은 정보기술(IT) 거품 붕괴와 함께 주인 없는 회사로 전락하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지켜봤다. 한때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던 이찬진 신화의 몰락과 2기 한컴을 이끌던 전하진 사장의 방만한 투자와 겉잡을 수 없는 추락도 접했다.
또 한지붕 아래에서 두 가족이 다투는 경영권 분쟁 역시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우여곡절속에 13년을 살아온 한글과컴퓨터의 부침(浮沈)을 상-중-하에 걸쳐 짚어본다.

<上>빼앗길 뻔한 한글워드 주권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이 아래아한글을 포기할 마음을 먹은것 같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급히 (김재민) 사장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1998년 6월 초 마이크로소프트(MS)코리아를 이끌던 김재민 사장은 이런내용의 전화를 박준모 MS코리아 인터넷사업부 이사로부터 받는다.
당시아래아한글에 가로막혀 ‘MS워드’가 한국에서만 유독 맥을 못추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 사장은 흔쾌히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곧바로 미국 본사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8일 저녁 선릉역 인근 지하 단란주점으로 김 사장을 비롯해 박 이사, 이찬진 사장은 주위의 눈을 피해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서 김 사장은 이 사장으로부터 한컴의 자금난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과 MS가 아래아한글의 지적재산권을 가져가는 대신 부채를 갚을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

“당시 이 사장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해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저희를 찾았겠습니까. 단기부채 100억원을 막지 못해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현재는 더존디지털웨어의 최고경영자(CEO)인 김 사장의 회고다.

첩보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밀스럽게 만난 이들은 긴장된 마음에 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다.
MS가 한컴에 투자하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뿔뿔이 흩어졌다. MS코리아는 곧바로 김&장 법률사무소를 주축으로 회계법인 등을 급조해 한컴 실사팀을 꾸렸다.

이 사장이 9년 동안 고집스럽게 지켜온 아래아한글을 경쟁사인 MS에 넘기기로 마음먹은 것은 궁여지책 그 자체였다.
외환위기 후유증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98년 4월 들어서는 하루하루 어음 결제가 안될 정도로 자금난이 심각해졌다.

당시 아래아한글 유통을 맡았던 한컴서비스의 박상현 사장은 이렇게 전한다. “한컴 부도는 시간문제였습니다. 이때 이 사장은 한컴을 매각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때부터 이찬진 사장은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박상현 사장과 함께 한컴을 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못한 한컴은 급기야 5월 13일 2억5000만원의 어음을 갚지 못하고 1차 부도를낸다.

다행히 이 사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민화 메디슨 사장이 한컴 어음을 대신 막아준다.
하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역부족이었다.
5월 21일 자회사인 한컴서비스마저 1차 부도에 휩쓸리게 된다. 당시 한컴 직원이던 K씨는 3개월 이상 직원들 월급이 묶일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올 것이 오고만 것은 6월 15일. 한컴 분위기는 극도로 침울했다.
100여명이 넘는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 든 서울 롯데호텔. 한컴과 MS코리아의 공동 기자회견이 진행된다. 자리에 나란히 앉은 이 사장과 김 사장은미국 MS로부터 1000만~20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대신 ‘아래아한글’ 사업을 포기하는 양해각서(MOU)를 맺는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꼽히던 이 사장이 1000만 아래아한글 이용자들의 자존심을 저버리고 MS에 무릎 꿇은 사실을 온세상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시간 영등포에 위치한 한컴 사무실은 자괴감에 빠진 직원들로 술렁거렸다.
반면 한컴으로서는 이날 회사의 부도를 막을 수 있는 15억원의 자금을 MS로부터 빌려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한사코 익명을 요구한 당시 한컴의 한 임원은 회사 위기상황을 이렇게진단했다.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가 표면적인 원인이었지만, 이 사장의방만한 경영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매출 증가율이 하향곡선을 그릴 때에도 이 사장의 사업 확대는 계속됐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사업도 진행시키고는 했습니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겹친 것입니다.”

한컴의 아래아한글 포기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컴퓨터 이용자들이 동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단적인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불법복제 소프트웨어가 문제였다는 이찬진 사장의 언급에 대해서는 국내 이용자들의 자성 분위기도 감지됐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PC통신 이용자들을 중심으로 아래아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래아한글 포기 선언 이틀 후 벤처기업협회 이민화 회장은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을 비롯해 협회 리더들을 소집한다.
아래아한글 구출작전회의였다.
다음날 이민화 회장은 아래아한글이 MS로 팔릴 경우 한국은 1조원의 손해를 입는 것이라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때마침 방한한 MS의 빌 게이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한국 정보기술(IT)산업에대한 투자의견을 밝혔다.
당시 IMF 관리체제에 있던 우리나라는 외자 유치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당시정보통신부를 이끈 배순훈 장관은 기업활동에 정부가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뚜렷이 했다.

한컴사태 1주일 후인 6월 22일. 아래아한글을 MS에 내줄 수 없다는 여론을 등에 업은 이민화 회장은 한글학회를 비롯해 15개 사회 단체와 함께 ‘한글지키기국민운동본부’를 설립,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본부는 10억원을 투입해 기획업무를 맡긴 대홍기획과 함께 1만원 국민주 운동, 100만 회원모집 운동 등을 펼쳐 나간다.

보름 정도가 지났을까, 한컴사태는 소강 상태에 들어선다.
한컴 사태를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아래아한글의 프로그램 소스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아래아한글을 대체할 토종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까지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분명한 것은 아래아한글을 MS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국민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이다.

한글지키기운동본부의 활동은 물밑에서부터 시작됐다.
7월 중순 이 회장은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인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과 함께 김재민 MS코리아 사장을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다.
김 사장의 회고.
“이 회장이 저에게 아래아한글 인수를 포기하라고 하더군요.
계약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해 무척이나 기분이 상하더군요.
리고는 대뜸 벤처기업협회 강연도 해달라는 말을 했는데 도통 앞뒤가 안맞는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또 만난다.
“이 회장과 김 사장, 저는 아래아한글이 MS로 넘어가든, 한글지키기운동본부와 함께 독자 노선을 걷든 법적인 부분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현정 사장의 회고다.
이에 대해 김재민 사장은 조 사장의 말에 대해 “당시 어떤 합의도 없었다”며 내용 자체를 부인했다.

MS의 투자금을 받겠다는 이찬진 사장의 결심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MS에 아래아한글을 넘기면 한컴의 경영권이 보장되는 데다 임직원들의 재산도 보호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컴 경영진은 자신들의 집까지 담보로 잡힌 상태였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지속된 MS와 한컴의 협상은 7월 16일 새벽 모든 부분의 조율을 마치고 20일 최종 투자안에 양측 대표가 서명하기로 약속하는 것까지 진행됐다.
다 된 밥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MS 측은 제헌절인 17일부터 시작되는 연휴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다.

그러나 불씨는 남아 있었다.
한컴 경영진의 입장은 완벽히 굳어진 것이아니었다.
처음부터 MS에 아래아한글을 넘기는 것에 반대한 박상현 사장은 정내권 이사를 설득해 경영진 안에서의 논의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는 또 이민화 회장과 함께 한컴 자금난 해결책을 제시하며 이찬진 사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7월 18일 이 사장은 아래아한글을 살리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게된다.
이들은 즉시 MS 측에 이 사실을 알리고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MS와의 결별을 공식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운동본부는 200억원을 조성해 한컴 부채를 해결하기로 했다. 또 이 사장은 CEO자리에서 물러나 최고기술담당자(CTO)로 백의종군할 뜻을 밝힌다.

결국 아래아한글을 MS로 넘기기 위한 이 사장과 김 사장의 한 달간의 밀월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7월 27일 한글지키기운동본부는 2기 한컴 경영권을 전하진 사장에게 넘기고 10월 19일 해산한다.

출처: http://blog.naver.com/kaiacom.do?Redirect=Log&logNo=100003618739

Posted by 창신다이
박응호님
한글과컴퓨터 - 나모인터랙티브 - 고누소프트
http://hompy.dreamwiz.com/hopark/cgi-bin/main.cgi?cmd=m
http://blog.daum.net/hopark

정내권님
한글과컴퓨터 - 드림어플라이언스 - 엠트레이스테크놀로지
ttp://www.emtrace.com/
Posted by 창신다이

출처: http://ddaddajoo.com.ne.kr/apphis.html
::: 한글과컴퓨터 (아래아 한글)의 역사 :::

89년 1.0, 1.2, 1.3 출시

서울대를 졸업한 이찬진 씨는 알고 지내던 프로그래머 세 명(정내권, 우원식, 김형집)을 모아 한/글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베타버전인 0.9판을 89년도 초반에 출시한다. 물론 이때의 베타버전은 소규모로 지인들에게 배포되었다고 하고(참고로 우리나라 컴퓨터 관련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메카인 청계천에 뿌려 졌다고 한다. 반응 좋았음. 그래서 이곳에서 사업성을 확인함. 테스트 용.), 최초의 상용버전인 1.0판이 1989년 4월 출시되면서 한/글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5.25인치 2D (360KB)디스켓 3장의 용량으로 만들어진 한/글 1.0판은 용산 전자상가의 소규모 유통업체인 러브리컴퓨터 라는 회사를 통해 10만원의 가격으로 출시되었다. 물론 상용버전인 만큼 매뉴얼도 들어있었지만, 이때는 대량생산을 하지못해 링형 바인더로 묶여진 매뉴얼을 제공하는 등 매우 조악한 패키지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 당시에는 외국산 워드프로세서를 한글화한 프로그램들만이 존재 하였던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이는 정말 획기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 중 사건이었다.

이렇게 출발하게 된 한/글은 이찬진, 정내권, 우원식, 김형집에 의해 만들어 졌다. 세 명이 프로그래머이고 이찬진씨가 실질적인 경영을 맡았다고 한다.


< 아쉽지만 아직 이전 버전의 플그림은 구하지 못했다.>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 이름을 달기 전에, 한/글의 1.2판, 1.3판이 출시된다. 주로 각주 등 편집, 인쇄 기능이 많이 향상되었다. 당시에 판매되던 한/글은 출력할 수 있는 해상도의 조건에 따라 레이저판, 도트판이 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300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레이저판은 27만원, 180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도트판은 9만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그리고 레이저판에는 불법복제를 막기위해 프린터포트에 꽃아야만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하드웨어 키가 들어있었다.

91년 1.5 출시

91년 1월에 드디어 크게 성공한 상용제품인 1.5판이 출시된다. 가격은 이전과 동일하였으며 도트판과 레이저판의 두 종류로 나뉘어져 발매되었다. 이 때 이찬진씨가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를 열었으며, 한글문화원 사무실 내부에 4평짜리, 5000만원으로 설립된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외부 직원들을 영입하기 시작한다.

도트판의 경우 2D 디스켓 다섯장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당시 컴퓨터들이 하드디스크가 없는 제품들이 대부분이라 한자사전을 쓰기위해 디스켓을 바꿔끼우고, 인쇄를 하기위해 디스켓을 바꿔끼우는 식으로 아주 불편하게 워드를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의 한/글 1.5판은 지금의 워드프로세서와 비교하면 기초적인 수준의 기능이 들어있었다. 파란바탕화면에 고정된 글자크기(기본, 혹은 가로세로 2배확대)만이 입력가능했고, 기본적인 정렬기능, 선그리기를 이용한 표그리기 기능 정도만이 가능했다. 글꼴은 명조, 고딕, 필기, 샘물의 4가지 한/글 글꼴만이 들어있었다. 현재 Windows에 기본으로 제공중인 워드패드만도 못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한/글은 옛한글, 외국어를 포함해 완성형 코드로 표현 불가능한 11172자의 한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으며, 두벌식 글판뿐 아니라 세벌식390 글판도 지원하는 등 한글 입력시스템은 이미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몇가지 버그를 수정한 한/글 1.52판으로 이미 최고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라는 평을 받은 한글과컴퓨터는 제품의 성공으로 얻은 자금과 인력을 통해 기존 버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능을 갖춘 당시로서는 외국의 워드프로세서보다도 뛰어난 기능의 한/글 2.0을 92년 7월 발매하게 된다.

92년 2.0 출시

한/글 2.0은 레이저판과 도트판의 구분을 버리고, 일반용과 전문가용이라는 구분을 달고 출시된다. 가격은 예전과 동일하게 일반용은 9만원, 전문가용은 27만원이었지만 1.52 레이저판의 모든 기능을 2.0 일반판에서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격은 1/3으로 내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글 2.0가 한/글 1.52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는 가로/세로 두배확대만 가능했던 글자크기 조정기능이 1포인트~127포인트까지의 가변크기 조정기능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 기능은 전문가용에서 최초로 도입한 윤곽선 글꼴 기능과 맞물려서 당시 한/글 1.52버전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는데, 127포인트로 화면에 가득차게 확대를 해도 깨지지 않는 글꼴을 본 많은 사람들을 많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또한 컬러인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초로 표편집 기능, 다단편집 기능과 문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틀(글상자, 그림 등)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생겨났고, 컴퓨터 프로그램 최초의 한글 맞춤법 검사기능을 탑재, 띄어쓰기 오류등을 정확하게 지적해주기 시작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도움말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추가한 2.0버전의 출시로 한글과컴퓨터의 명성은 더욱 오르기 시작하고, 소프트웨어 업계의 최고의 스타로서 한글과컴퓨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기능들의 추가로 인해 디스켓의 장수도 이전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하드디스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전문가용 버전이 XT컴퓨터에서 돌아가지 않는 바람에 업그레이드 수요도 부추겼다.

이 때부터 묵향 등 한/글용 외부 글꼴패키지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끌게된다. 한/글의 성공으로 인해 한/글 글꼴 시장에도 활기를 띄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하나워드나 보석글과 비슷한 타자기 수준의 품질로 전자출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글 옛버전과 비교했을 때, 매킨토시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던 한글 전자출판이 한/글 2.0으로 인해 IBM PC에서도 가능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한/글 2.0은 한글의 기계화에 역사적인 공헌을 한 첫번째 작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후에는 더 이상 한/글의 독주를 저지할만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

93년 2.1 출시


93년 9월 한/글 2.1버전이 출시된다. 한/글 2.0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는 없지만 글꼴을 그리는 알고리즘이 개선되어 인쇄된 문서가 좀 더 깔끔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었고, 프로그램상의 한계로 인해 존재했던 편집 매수 제한이 500쪽으로 늘어나면서 책 한권을 너끈히 찍어낼 수 있는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모아찍기, 나눠찍기 등의 인쇄기능이 새로 추가되었고, 포스트스크립트 호환 영문글꼴 등 휴먼컴퓨터사의 글꼴이 추가되기도 했다. 전문가용 버전은 처음으로 32비트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이외에도 세세한 개선점들이 많았다.

멀티미디어와 윈도 환경의 보편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한글 윈도우즈 3.1을 내놓으면서 멀티미디어 PC/홈 PC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사운드카드에서는 사운드 블라스터 16, 옥소리 WS16 등을 시작으로 음악시디 수준의 녹음/재생이 가능한 제품이 출시되었으며, 비디오카드로는 ET4000, ATI 마하64 등 동영상 가속과 6만컬러 이상의 동시출력이 가능한 비디오카드가 출시 되었고, CD-ROM이라는 대용량의 A/V 데이터를 담을 수 있는 미디어와 2배속 드라이브가 등장하였고, 이를 받쳐줄 한글 윈도 3.1 이라는 운영체제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환경을 컴퓨터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멀티미디어 PC의 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윈도 3.1의 대대적인 보급이 한/글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글이 갓 2.1판을 출시하고 도스용 2.5판 개발에 들어갔을 즈음 한글 윈도에서 동작하는, 윈도우즈의 장점을 한껏 살린 여러가지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금성소프트의 윈워드,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워드 5.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등이 등장하면서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3.0b 윈도용이 등장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다른 업체들은 이미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한/글에서 불가능한 멀티태스킹, OLE등의 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든 개체의 삽입 수정, 3차원 글꼴다듬기(글맵시/워드아트), 윈도용 트루타입 글꼴 호환, 9개 까지의 다중 문서편집(한/글은 그때까지 2개의 문서만 동시에 열수 있었음.)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나름대로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즈음, 한글과컴퓨터는 여전히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5를 개발하면서 시간을 천천히 끌어간다. 물론 윈도용 한/글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속도나 안정성 측면에서 부족하고 보급이 더딘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한/글 때문에 한국의 윈도 보급이 다른 나라보다 더 느려졌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당시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한/글의 힘은 강력했다.

94년 2.5 발표

그렇게 한글과컴퓨터가 끊임없는 버전업과 많은 프린터 드라이버와 글꼴을 개발해 나가는 도중에, 94년 SEK 전시회가 열리게 되고, 한글과컴퓨터는 그 행사에서 한/글 2.5를 발표 하게 된다. 당시 한/글을 홍보했던 SEK 전시회의 한글과컴퓨터 부스의 크기는 마이크로소프트같은 대형 업체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엄청났었고, 전시회의 프로그램 내용이나, 행사의 질에 있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한글과컴퓨터는 한컴비젼 2000을 선언하였다.

한/글 2.5는 덧실행이라는 이름으로 애드온프로그램을 지원함으로써, 다양한 유틸리티들을 한/글 실행 도중에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지원했으며(물론 멀티태스킹은 지원하지 않았음), 다른 프로그램 개발 업체에도 관련 제작툴을 공개하면서 작게나마 통합플랫폼을 지향하기도 했다.

또한 2.1 전문용을 업그레이드 한 2.5 기본판이 12만원이라는 가격으로 매겨지면서 가격을 50%가 넘게 인하하였다. 대신 확장팩을 출시하였는데 국내 최초의 중형 영한전자사전인 프라임영한사전, 신명시스템, 태시스템의 추가 글꼴 등을 15만원의 가격에 판매하였다. 또한 최초로 시디롬 버전을 추가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마우스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고 글꼴 변경시 변경 내용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등 여러가지 작은 개선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윈도우즈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한/글 2.5 구입자들에게는 윈도용 한/글 3.0 무료 교환쿠폰이 제공되었다. 또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한/글 2.5가 포함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한/글은 2.0 버전 이후부터 미국의 워드퍼펙트이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많이 참조하였다고하는데 기능의 구현이나, 조판방식 등에 있어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있기 전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워드프로세서였던 워드퍼펙과의 전락적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윈도용 한/글 3.0이 몇 달 뒤 출시된다.

95년 3.0 발표

한/글 3.0판 윈도용이 95년 3월 출시되었다. 윈도용 한/글의 첫 출시는 윈도 95 출시와 함께 그 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윈도용 한/글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운영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 인터페이스, 독립 입출력 방식을 채택하였다. 윈도용 한/글 3.0은 윈도 3.1의 기본 프로그램 모양를 따르지 않고, 넥스트스텝과 윈도 95의 인터페이스를 혼합한 형태의 프로그램 모양을 선보였다. 한/글 1.0 버전부터 거의 변하지 않았던 구닥다리 인터페이스를 기억하는 많은 사용자들은 한/글의 변신에 매우 놀라워했다.

또한 완성형 한글 코드만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입력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도스용 한/글의 입력체계를 그대로 이식함으로써, 11,172자 현대 한글은 물론 옛한글까지 전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조합형 한글 체계를 통한 한글의 완전한 표현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한/글이니 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도스용 한/글의 글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단축키도 도스용 한/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도스용 한/글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기존 도스용 한/글의 문서를 아무런 손상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렇게 기존 도스용 한/글의 커널을 그대로 윈도용으로 컨버전한 한/글 3.0은 도스용 한/글의 장점 위에 멀티태스킹, OLE 기능, 윈도용 글꼴 및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 글맵시 기능 등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서 꼭 필요한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서 빠른 속도로 도스용 한/글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글 3.0에는 버그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32비트 코드로 작성된 한/글 3.0이 16비트 운영체제인 윈도 3.1에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Win32s 런타임이 불안정 했기 때문으로, 패치 버전인 한/글 3.0a에서는 어느정도 문제가 해결 되었지만 윈도 95가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가격은 기본팩이 12만원으로 책정되어 2.5와 동일했으며, 2.5의 확장팩 내용을 담은 추가CD가 4만원의 가격으로 추가 인하되었다.

마지막 도스용 한/글 발표

그리고 도스용 한/글의 마지막 버전인 한/글 3.0 도스용이 그해 6월 출시된다. 도스용 한/글 3.0은 윈도용 한/글 3.0에서 편집한 파일을 변환없이 바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인터페이스가 이전 한/글 2.5에서 약간 개선되고 도구상자를 추가함으로써 좀 더 편리한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영 자동 변환 기능 및 빠른 교정기능, 하이퍼 링크(하이퍼텍스트)기능이 추가되었다. 한편 덧실행 기능이 더 강화되어 PC통신 에뮬레이터/공학용 계산기/CD플레이어 등을 한/글 내부에서 실행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수채화라는 그래픽 편집/드로잉 프로그램을 도스용 한/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번들로 제공했으며, 타자연습 프로그램도 기본 제공했다. 가격은 기본팩+CD-ROM이 12만원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3.0b 발표

윈도 95가 출시된 직후, 윈도용 한/글 3.0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3.0b가 출시되었다. 기본 내용은 3.0과 동일하지만 윈도 95에서도 실행이 가능해졌고, 여러가지 버그가 수정되었으며,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이 추가되었다. 윈도 3.1에서의 한/글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윈도 95에서는 해결됨으로서 이 때를 기점으로 한/글이 윈도에서 자리를 잡게되는 계기가 된다.

한/글 3.0b가 대중적인 성공을 얻고난 후, 한/글은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 완전히 성격을 탈바꿈한다. 더 이상의 도스용 버전 개발을 중단하고, 다음 버전인 윈도용 한/글 96의 개발에 모든 노력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공략과 한/글 오피스

이 때, 파워포인트와 엑셀과의 통합을 무기로 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국내 기업체 공략이 거세지기 시작한다. 그때까지의 최고의 오피스 슈트였던 로터스 1-2-3와 워드 퍼펙을 미국에서 완전히 물리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95버전까지만 해도 한글판의 불완전한 번역, 잦은 버그, 한/글 문서와의 미호환, 국내에서 굳게 자리잡은 한/글의 텃세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7버전에서 부터 VBA를 이용한 특유의 확장성, 네트웍을 통한 다중 사용자의 작업 공유 기능, 기존 프로그램에서 보여주지 못한 여러가지 사용자 편의 기능,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의 강화, 전세계 문서 호환 등을 앞세워 점차 기업체를 중심으로 사용자 수를 늘려가기 시작한다. 그 뿐 아니라 삼성전자라는 대기업의 자본을 발판으로 무섭게 성장해간 훈민정음도 한/글의 시장을 조금씩 잡아먹기 시작하면서 미처 기업 시장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던 한글과컴퓨터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편 이때 한글과컴퓨터도 한/글을 기반으로 한 오피스 슈트를 출시하는데, 이 첫 주자는 한/글 3.0b의 초기판에 저가로 번들(한/글 3.0b 구입자에 한해 3만원의 가격에 판매)된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이다. 물론 서로 다른 회사의 제품을 통합한 것인 만큼, 호환성에 약간에 문제가 있었고,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버린 제품들이라 그 파급력이 덜했지만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을 위해 어느정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한/글 96과 한글과컴퓨터의 부진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의 통합패키지로 선보인 한/글 프로 96과 한/글 오피스 96이 출시된다. 기본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인터넷 문서 편집, 문서마당 등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 된 한/글 96을 기반으로, 주소록, 타자연습, 폼프로세서 틀마름이, 팩스프로그램, 메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틸리티를 추가한 종합 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한/글 오피스 96에는 이전에 선보였던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의 업그레이드 판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과는 달리 기업체 시장을 타겟으로 출시된 한/글 오피스 96은 포함된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 프로그램의 기능 미비로 인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그나마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도 개인용 시장의 포화와 불법 복제등의 영향으로 이전 수준의 성공을 거뒀을 뿐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한글과컴퓨터의 미래는 점차 불투명해지기 시작한다. 한/글을 제외하면 한/그림, 한/아름, 한/맥등 출시한 여러 제품이 모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진출한 인터넷 시장에서도 검색엔진인 심마니를 빼고 별다른 실적을 낳지 못하면서 점차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한/그림은 벡터용 드로잉프로그램으로, 저가에 상당히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 소프트웨어였지만 후속제품이 출시되지 못하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등이 선점한 시장을 뺏어내지 못함으로서 개발이 중단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심마니도 국내 최초로 개발된 한글 자연어 검색엔진으로 상당히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며 한 때 검색 사이트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었으나 광고등의 수익유치에 실패하고 야후나 알타비스타 등의 국내 포털진출에 때맞춰 찾아온 한글과컴퓨터의 실적 악화로 데이콤에 팔리면서 후발주자인 네이버나 다음 등에 밀려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이 모였던 한글과컴퓨터는 경영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글의 기능 발전, 새로운 사업진출이나 시장개척에 어려움, 또한 IMF한파를 겪기 시작하고 결국 회사의 규모를 점차 줄이면서 한 때 2-3백명 가까웠던 사원들이 대폭 줄어 나중에는 60-70명 수준의 조그만 기업으로 남게된다. 그러나 1996년에는 한때 성공한 벤처기업모델로 부각도 되었으며, 정보통신업계최초로 코스닥에 등록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 해이다.

한/글 97

1996년 11월에는 한/글 96을 기반으로 중국어, 일본어 인터페이스 및 다국어 입력기를 채용한 한/글 국제판과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한 한/글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한/글 97을 탑재한 한컴홈 97과 한컴오피스 97이 출시되었으나, 판매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1998년 초에는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한/글 소스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기고, 더 이상의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하는 양해각서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체결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국민적인 반대여론에 부딪친 한글과컴퓨터는 이 협상을 없던 일로하고 한/글 815버전을 출시하는 한편,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은 회사 실적 악화의 책임(불법 소프트웨어도 한몫 단단해 했다.)을 지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PC통신 서명운동본부와 한글지키기 운동본부가 설립되고, 범국민 성금보내기, 공개제안투자제의 1인 1소프트웨어 갖기, 한 소프트 회원 운동등의 여러 운동을 통해 한글과컴퓨터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한/글 워디안

한/글 2.1이후, 한/글 97까지는 커널 기반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파일의 호환성도 어느정도 유지되었고, 사용법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00년 출시된 한/글 워디안은 모든 소스코드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이전 버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한/글 97의 소스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 한글과컴퓨터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글 워디안은 250단계의 다단계 되돌리기/반복 기능을 지원하고, 변형 다단 편집, 표 서식 기능 강화, 에센스 영한사전 및 표준 국어대사전을 삽입하는 등 커다란 개선사항이 있었지만, 워디안에서 작성한 문서가 이전버전에서 읽어지지 않는 문제, 이전버전의 문서가 워디안에서 본래대로 읽어지지 않는 문제, 프로그램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었고, 변경된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못한 사용자들이 여전히 한/글 97을 계속 사용하면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한/글 2002

한/글 워디안을 기반으로 이전 버전 파일과의 호환성 문제 및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제품. 2001년 출시되었다. 이후 외국계 펀드와 당시 경영진과의 한글과컴퓨터사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현재 한글과컴퓨터는 프라임산업개발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한/글 2004

XML 문서 지원과 공개키 기반 암호화, 스킨, 작업창 기능이 추가된 제품. 한/글 2004와 함께 출시된 한컴오피스 2004는 국산 스프레드쉬트인 넥셀과 자체 개발한 한컴슬라이드 2004를 포함함으로써 토종 오피스 슈트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직 기능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많이 밀리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파워포인트와 사용법이 비슷하며, 파일 호환도 가능해 주목받고 있다.

한/글 2005


1. 동일한 문서의 이력을 관리할 수 있는 버전 관리 기능
2. 같은 문서의 서로 다른 버전끼리 비교 가능함으로써, 간편하게 문서 변천 과정 조회 가능
3. 문서의 레이아웃에 영향을 주지 않는 메모 삽입 기능으로 원활한 의사소통 가능
4.인쇄 옵션에서 삽입된 메모의 인쇄 여부 설정 가능
5.형광펜 기능으로 문서의 중요한 부분을 표시할 수 있어 문서 회람 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6.문서 수정 시 자주 사용하는 취소선을 바로 넣을 수 있도록 도구 상자에 아이콘이 추가되었습니다.
7.문서구조정보로부터(XML Schema 지원) 기본 XML 양식 생성
8.XML 문서 작성 및 저장, 읽기 지원
9.한/글 XML 서식과 Database의 자유로운 연동 가능
10.한/글 XML 서식에 존재하는 데이터 값을 ODBC(Open Database Connectivity)드라이버가 존재하는 데이터베이스로 저장/삭제/검색 등의 기능 지원

11.OLE Automation과 Script를 이용한 타 프로그램(그룹웨어,EDMS 등)과의 연동성 강화
12.도구 상자에서 필요한 양식 개체를 본문에 쉽게 삽입 가능
13.아랍어를 입력하고 출력할 수 있는 R2L(Right to Left) 기능으로 손쉬운 아랍어권 문서 작업 가능
14.공개키(PKI) 기반의 암호화 솔루션을 사용한 중요 문서의 보안 문서로 저장하기 지원
15.대화상자에 자신만의 설정 값을 저장, 쉽게 사용 가능 (인쇄/글자모양/편집용지/다단/각주,미주/표셀속성 등)
16.기본 스킨 외에 한/글 97, 고전, 메탈 스타일 등 다양한 스킨 제공으로 취향에 맞는 스킨 적용 가능
17. 자주 사용하는 특수문자나 클립아트를 별도로 관리할 수 있으므로 더욱 편리한 작업 가능
18. 한자로 변환 기능 대폭 개선
19. 문서 찾기 인터페이스 개선
20. 편집 용지의 여백을 마우스로 조절 가능

21.한/글 인쇄 관리자 기능
22.투명 대화 상자 설정 가능
23.마우스 움직임을 스크립트 매크로로 만들어 사용 가능
24.상호 참조 기능을 통한 편리한 문서 관리
25.표의 대칭 뒤집기 지원
26.마우스를 이용한 동일 비율 크기 조절 가능
27.여러 셀에 걸친 대각선 및 배경 입력 가능
28.자동 채우기 데이터 사용자 추가 기능
29.다양한 기능의 작업 창을 이용한 빠르고 편리한 문서 작업 가능
30. 한/글 97의 편리한 기능 반영 (연결 인쇄 /수식 입력 방식 지원)
31.찾기 기능 강화
32.한국인이 자주 사용하는 문서 서식 2,500개와 한/글 전용 클립아트 3,000여개를 제공.

MS의 DOS 나 Windows에만 국한하지 않고 자체적인 Linux시스템을 가지고 그를 기반으로 하는 한/글 및 넥셀 오피스 등고 개발해오고 있다.

Posted by 창신다이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BLOG main image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 by 창신다이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48)
공장이야기 (115)
Education (30)
회사이야기 (19)
NHIT(2007.1 ~ 2008.12) (3)
2007 농협 e금융(2007.6 ~ 2007.1.. (1)
2008 농협 e금융(2008.6 ~ 2008.1.. (1)
KFTC(2008.12 ~ 계속) (5)
HAANSOFT(2006.1 ~ 2007.1) (9)
일상 (7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