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주가 붕괴…구원등판 끝내 무위로

<中>2기 한컴 전하진의 희비

돌릴 겨를도 없이 일은 진행됐다.
지난 1998년 7월 20일 토종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한글’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 한글지키기국민운동본부는 새로운 한글과컴퓨터(한컴) 경영진 구성에 나선다.

아래아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 정서가 뜨거웠던 만큼 발빠른 한컴 정상화작업이 필요했던 것.
운동본부는 한컴 신임 사장을 공개 모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7월 26일 역삼동 르네상스호텔 맞은편 무한기술투자 사무실.
일요일 오후시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토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한글과컴퓨터를 살리기 위한 사장 후보자들의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진 것이다.

“한글지키기운동본부의 이민화 본부장, 조현종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이찬진 한컴 사장 등 6명의 면접관 앞에서 최종 후보자들이 토론을 벌였습니다. 한컴을 살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것이었지요.
3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은 토론 도중에 포기할 정도로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2명이 막판까지 다퉜습니다.

‘세계화만이 아래아한글을 살릴 수 있다’는 저의 생각이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현재네띠앙을 이끌고 있는 전하진 사장의 회고다.

11시까지 이어진 면접에서 결국 운동본부는 전하진 사장을 한컴 사장으로 최종 선택한다.
이찬진 ‘1기 한컴’ 사장에 이어 ‘2기 한컴’의 주인공으로 전 사장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한 달 뒤 전 사장은 임시주주총회에서 정식 신임 사장으로 추인돼 본격적인 한컴 살리기에 나선다.
한컴 창립 8주년이 되는 98년 10월 9일 ‘아래아한글에서 인터넷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한컴 미래경영 비전을 발표한다.
이와 함께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00만주(100억원) 증자도 공모한다.

하지만 증자가 마음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이틀 동안 진행된 공모에서 청약받은 주식이 130만주에 그친 것. 당시 한컴 주식 시가가 3000원 선이었는데, 5000원으로 공모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런 이유로 99년 초반까지도 한컴의 자금 사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운동본부의 자금 지원이 당초 계획만큼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자금난을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전 사장은 외자 유치를 통해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전 사장은 우선 과거 지오월드를 이끌 때부터 알고 지내 온 투자유치회사 NHS의 한동훈 사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골드만삭스 ING베어링 홍콩상하이뱅크 등 각종 투자은행을 찾아다니며 한컴의 투자가치를 알리는 데  발품을 팔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99년 3월 25일 몇 개월간 지속된 노력으로한컴은 외자 유치에 성공한다.

전 사장의 말이다.
“사실 한동훈 사장이일을 성사시킬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부탁했으니깐요.
그런데 그가 일을 냈습니다. 700만달러 사모 CB 발행에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벤처기업으로서 외자 유치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7000만달러가 넘는 외자를 끌어들이는 초석이 됐지요.”

일단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한 전 사장은 아래아한글과 한컴의 구체적인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우선 아래아한글을 웹환경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넷피스’를 6월 초에 선보였다.
같은 달 국내 최초의 인터넷 채팅 사이트인 하늘사랑(www.skylove.co.kr)을 인수, 인터넷 이용자 기반도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 사장은 2기 한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예카 프로젝트’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카(Your ECommerCe Alliance)프로젝트란, 다양한 인터넷 사이트가 생활하는 허브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계획. 한컴의 가족사인 네띠앙과 하늘사랑을 바탕으로 다양한 중소 인터넷 사이트들이 입점해 공생하는 사이버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때맞춰 인터넷기업 주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새롬 , 다음과 함께 인터넷 3인방으로 꼽힌 한컴의 주가도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
11월에는 홍콩 통신 전문 투자기관인 TVG(텔레컴 벤처그룹)로부터 2200만달러(약 260억원)를 출자받기도 했다.
예카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총알도 마련된 셈이다.

그야말로 핑크빛이었다.
화려한 비전과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 거기에다 외자 유치까지. 막힘없이 예카 프로젝트는 착착 준비됐다.
전 사장과 뜻을 같이한 인터넷기업들도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제휴를 검토해야 했다.
전 사장은 예카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명의 해외 고급 인력을 데려오기도 했다.전 사장은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됨에 따라 당장에라도 예카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카의 주요 멤버였던 나종민 하늘사랑 사장의 회고.
“99년 말 예카 프로젝트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순간, 비용은 많은 들겠지만 성공하면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대형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컴이국내 대표 인터넷기업으로 부상하는 건 시간 문제로 느껴졌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었다는 설명이다.
순식간에 117개의 참여업체를 모은 예카 프로젝트는 2000년 3월 15일 정식 출범하게 된다.
예카 프로젝트와 관련해 한컴이 출자한 인터넷기업만 40개를 넘어섰다. 이때 전 사장도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9회말 구원투수로 나와 한컴을 멋지게 살린 것.
98년 6월 자본금 42억원, 시장가치가 40억원에 불과하던 한컴을 2년도 지나지 않아 자본금 243억원, 시장가치가 2조원에 이르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당시 전 사장의 경영 성과는 1980년대 경영 부실로 주저앉은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를 살린 리 아이어코카 회장에 비유되며 ‘한국판 아이어코카’로 불리기도 했다.

너무 성급한 비유였을까.
예카 출범 한 달 후인 2000년 4월 17일 블랙먼데이로 시작된 인터넷기업의 몰락과 함께 한컴도 빠른 속도로 쇠락하고 있었다.
예카 프로젝트마저 ‘회원의 동의 없이 수집된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발목이 잡혀 실현불가능한 모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게 네띠앙과 하늘사랑의 합병이었다.
이 방법 외에는 인터넷 허브 사이트를 만드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침울한분위기를 반영한 듯 합병도 여의치 않았다.
네띠앙은 2대주주인 무한기술투자의 반대로 합병을 하지 못했다.
하늘사랑은 1000억원대의 주식매입청구권이 몰려 합병이 불가능했다. 결국 전 사장은 2000년 11월 예카프로젝트 포기를 선언한다.

전 사장의 회고. “무척이나 우울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지요. 너무 사업을 서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카의 운명과 궤를 같이해 전 사장의 주가도 하향곡선을 그려야 했다.

5000만달러에 이르는 해외 전환사채 만기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또 기업 주가 하락과 400억원에 달하는 인터넷기업 투자에 대해 대주주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특히 TVG의 경우 인터넷 투자를 부추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주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 사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2001년 8월 전 사장은 더 이상 회사에 몸담을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된다.
당시 한컴 이사회에서도 인터넷사업 실패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다.
전 사장도 할 말이 없었다.

한컴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컸기 때문이다.
그는 곧 한컴이 대주주로 있는 네띠앙을 잘 키우면 한컴과 네띠앙 모두 도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네띠앙으로 옮기기로 마음먹게 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컴을 떠난 셈이다.

결국 한 달 후인 9월 26일 전 사장은 사장직을 사임하며 2기 한컴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Posted by 창신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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