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분쟁 '혼돈'걷고 책임경영 시동

<下>주인없는집 '문패' 싸움

2003년 2월 7일. 논현동 한글과컴퓨터 대회의실 분위기가 심상찮다.
오전부터 조용하게 진행되던 이사회가 오후 들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회의는 영어로 진행됐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폴류(류한웅) 사외이사가 먼저 장내 정리라도 하듯경직된 목소리로 안건을 내놓았다.
“이사회에서는 김근 대표이사가 사임하기를 요구합니다.”
물론 예고없었던 안건이 던져진 것.

순간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의 김 사장이 폴류 이사에게 뭔가 어필하려 했고 그와 동시에 일사천리로 표결이 이어졌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짠 듯 김진 재무담당 전무와 최승돈 최고기술담당자(CTO)는 찬성표를 던졌다.
이어 폴류 사외이사를 새로운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안건도 통과시켰다. 이렇게 최고경영자 교체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김 사장으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거지요.
갑자기 대표이사 사임건을 회의 안건으로 올리더니 회사를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앞이 캄캄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어던 것도 아닙니다.
회사 경비를 많이 썼다는 둥, 영업실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둥 그런 것들이 이유라더군요.”

그날 저녁 김 사장은 대표이사 사임 소식을 접한 10여명의 팀장급 직원들과 인근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술잔이 몇 순배 돌 때쯤 김 사장이 사임하면 폴류 이사와 김 전무가 회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사임해서는안 되며, 김 사장이 버티며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 주면 노조를 중심으로이사회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는 요지의 얘기가 오갔다.
이사회를 마칠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던 김 사장은 측근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이사회 결정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2기 한컴의 인터넷 사업 실패에 대한 후유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며 3기 한컴이 시계제로의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이사회 멤버의 전언.
평소 김 사장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스타일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문제로 사임한다는 것과 경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시킨다는 두 가지 내용의 보도자료를 만들어 놓고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수긍하지 않더군요.

결국 김 사장이 퇴임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명확히 전달함에 따라, 김 전무를 비롯해 이사회 멤버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영 수행능력 및 리더십 부재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근 사장을 해임한다’는 보도자료를배포한다.

김 사장으로선 한컴 취임 1주년의 기쁨도 잠시, 회사에서 쫓겨나는 치명타를 입게 된 셈이다.

양측의 엇갈린 이해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채 주말이 지나갔다.
쫓겨나다시피 사장실을 내주고 마케팅 이사실로 출근하기 시작한 김 사장은10일 오전부터 직원들과 모임을 갖고 7일 이사회에서 일어난 대표이사 사임 결정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설명했다.
또 이사회 결정이 합법적으로결정되고 종결되었는지 여부를 법에 의해 판단될 때까지 대표이사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돌렸다.
한컴 노조도 일단은 김 사장에게 힘을 실어 줬다.
이날 노조는 오후 2시 “적법성이 명쾌하게 입증될 때까지 김근 대표를 한컴의 대표로 인정한다”는 성명서를발표했다.

이에 맞서 신임 사장으로 선임된 폴류 사장과 김 전무는 “한컴과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입장을 언론에 알리는 동시에 2002년 매출액이 전년에 비해 31.6%나 감소했다는 공시를 통해 김 사장의 경영 성과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부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3기 한컴은 출범 1년 만에 ‘한 지붕 두 집 살림’이라는웃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한컴이 최대주주가 없는 ‘주인 없는 회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한컴은 1% 이상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사진들이 난리쳐도 누구하나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온갖 풍문이 난무하며 지리한 공방이 이어진다.
김 사장이 허구한날 친구들과 골프치러 다녔다느니, 월드컵 때에는 업무를 뒤로한 채 축구장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느니 갖은 얘기들이 나돌아 다녔다.
뿐만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인 김 전무가 사장이 되기 위해 폴류 이사를 앞세워 김 사장을 내쫓았으며 한컴에서 받는 높은 임금을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받기 위해 김 사장을 해고했다는 등의 소문도 퍼져나갔다.

경영권 분쟁이 법적 분쟁으로 번져 나갈 즈음인 2월 18일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다.
서울시스템이 한컴 지분 3%를 확보해 한컴의 최대주주가 된 것.
김 전무 측의 우호세력으로 알려진 서울시스템(대표 최종표)이 최대주주로 부상함에 따라 경영권 분쟁은 일단 김 전무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울시스템이 한컴 지분을매입한 후 20일 김 사장이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 등에 관한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것.
만약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 노조를 등에 업은 김 사장으로선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는 셈이다.

법원은 1, 2차 심리를 거쳐 3월 19일 최종 판결을 내렸다.
결론은 김 사장의 기대와 달리 ‘기각’이었다. 대표이사 경질에 대한 내용을 김 사장에게 통고하지 않았으나 이사회 결의를 무효화할 만큼 문제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었다.
김 사장으로서는 한숨만 나왔다.
며칠 후에 열린 주주총회에서마저 김 사장이 추천한 사외이사가 선임되지 못하자 상황을 역전시킬 희망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이때부터 김 사장은 한 달 넘게 지속해 온 출근 투쟁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그것도 잠시. 같은 날 김 사장의 고등학교 친구인 백종진 프라임벤처캐피털 사장의 형인 백종헌 프라임산업 회장이 한컴 주식 7.31%를 획득하며 기존 서울시스템을 제치고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김 사장은 2월 경영권 분쟁이 터진 후 동창 모임에서 백 사장에게 한컴 상황을 설명했던 터였다.
순간 상황이 역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날 프라임 측은 경영권분쟁에 대해 중립이라는 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셈이다.

김 전무 측은 최대주주로 부상한 프라임과 상관없이 서울시스템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이사회 결정을 기정 사실화시켜 나갔다.
김 사장 측근으로 알려진 프라임을 통해선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호 경영권 안정을 위한 지분을 교환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맺었으며 당초 계획대로 업무 협력을 위한 테스크포스까지 구성했다.

순탄하게 진행되던 이들의 협력은 4월 들어 삐걱대기 시작한다.
먼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서울시스템의 최 사장. 그는 한컴의 지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한컴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려 했다.
폴류 사장이 물러나야 한컴 지분 확보에 참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최 사장의 회고. “폴류사장을 몇 차례 만나봤지만, 사장감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에만 밝은 전형적인 컨설턴트였죠.
그래서 폴류 사장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3개월 내에 사장직을 사임하는 계약을 맺고 한컴의 해외 전환사채(CB)를 매입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이 화근이었다.
류 사장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다.
류사장을 비롯해 김 전무로 하여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 4월 중순부터 김 전무를 중심으로 한 한컴 이사진과 프라임산업의 접촉이 시작됐다.

급기야 4월 18일 역삼동 라마다르네상스 호텔 뒷편에 위치한 일식집에선 김 전무와 함께 백종진 사장, 박상현 한컴리눅스 사장이 첫 모임을 갖게 된다.
특히 김 전무의 부친과 백 회장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어서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날 모임을 계기로 백 사장과 김 전무의 교감이두터워졌다.
이후 김 전무와 백 사장은 백 회장과 함께 골프를 치며 한컴의 1대주주로 프라임이 들어오는 데 서로 협조하자며 의기투합한다.

이렇게 해서 두 달 동안 지속된 김근 사장과 폴류 이사를 앞세운 김진 전무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4월 25일 프라임벤처캐피털의 백 사장은 3자배정 유상증자(59억원1000만원)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한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아래아한글이라는 키워드로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더니 인터넷주 버블 붕괴와 경영권 분쟁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한컴. 갈등은 더 이상 없을지, 안정성장을 구가할지 새 주인 프라임산업의 경영전반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Posted by 창신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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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 by 창신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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